서울 도심 한가운데, 세종대로를 따라 걷다 보면 육중한 석축 위에 올라선 웅장한 문 하나가 시선을 끈다. 우리가 익숙하게 “남대문”이라고 부르는 곳, 정식 이름으로는 숭례문(崇禮門)이다. 조선의 수도 한양을 지키던 4대문 가운데 남쪽을 담당하던 대문으로, 한때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던 건축물이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40, 문화재 지정 명칭은 국보 (구)제1호, 지정일은 1962년 12월 20일이다. 소유는 국유이며, 현재는 문화재청 덕수궁관리소가 관리하고 있다. 분류로 보면 ‘성곽시설’에 해당하는 유적건조물이고, 시대는 조선 태조 7년, 즉 1398년으로 올라간다.
‘남대문’이 아니라 ‘숭례문’인 이유
조선은 수도 한양의 성문 이름을 오행사상과 유교적 덕목에 맞춰 지었다.
서울 4대문과 보신각 이름에는 다섯 가지 덕목, 즉 인(仁, 동), 의(義, 서), 예(禮, 남), 지(智, 북), 신(信, 중앙)이 대응되도록 배치했다. 그중 남쪽 문에 붙은 글자가 바로 ‘예(禮)’이고, 여기에 ‘숭(崇, 높이다)’를 더해 숭례문, 곧 “예를 숭상하는 문”이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남대문”은 남쪽에 있는 큰 문이라는 뜻의 별칭일 뿐, 조선 시대 공식 명칭은 숭례문이었다.
숭례문 편액(현판)의 글씨를 누가 썼는지는 지금까지도 논쟁거리다.
《지봉유설》 등 옛 기록에서는 양녕대군이 썼다고 전하지만, 다른 견해도 많다. 추사 김정희의 《완당전집》에서는 조선 초기 문신 신장의 글씨라고 했고,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숭례문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짓고, 현판 글씨는 정난종이 썼다는 견해를 적어 놓았다. 일제강점기 잡지 《별건곤》에서는 안평대군이 아니라 유진동의 글씨라는 주장도 등장한다.
서울 성문들 대부분은 현판을 가로로 걸었지만 숭례문만 세로로 걸려 있는 것도 특징인데, 이는 관악산의 화기(불기운)에 대응하기 위한 풍수적 배치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 초기부터 서울의 상징이 되기까지
숭례문의 시작은 태조 5년(1396년)으로, 최유경의 지휘 아래 축성이 시작되었다.
태조 7년(1398년)에 완성되었고, 이후 세종 29년(1447년)과 성종 10년(1479년)에 크게 고쳐 지은 기록이 남아 있다. 1433년에는 아예 헐어내고 땅을 돋운 뒤 다시 짓기로 했고, 1447년경 신축이 시작되어 1448년 3월 17일에 새로 완공되었다는 기록도 전한다.
성종 9년에는 문이 기울어 수리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나, 시기를 조절하다가 이듬해인 1479년에 중수가 마무리되었다.
근대에 들어와 숭례문은 여러 번의 큰 변화를 겪는다.
1907년,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가 조선을 방문했을 때, “황태자가 성문 아래로 지나갈 수 없다”는 이유로 일제는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헐어버렸다. 그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을 내고, 문 둘레에는 일본식 화강암 석축을 쌓았다. 이때부터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었고 숭례문은 도로 한가운데 고립된 기묘한 풍경으로 남게 된다.
1908년에는 숭례문과 소의문 사이 성벽 일부가 헐렸고, 1934년에는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보존령에 따라 보물 1호로 숭례문을 지정했다. 보물 2호는 흥인지문, 3호는 원각사지 십층석탑, 4호는 보신각종이었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파손 복구를 위해 1961년부터 해체 수리가 진행되었고, 1963년에 공사가 완료되었다. 1962년 12월 20일에는 일제의 보물 지정 체계를 참고해 숭례문을 국보 제1호로 다시 지정했다. 이후에도 도로와 차량에 둘러싸인 숭례문을 시민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돌려주기 위한 시도들이 이어졌다.
2003년에는 일제에 의해 헐렸던 성곽 일부를 좌우로 10m씩 복원했고,
2005년 5월 27일에는 도로 한가운데 고립되어 있던 주변 공간을 광장으로 정비했다.
2006년 3월 3일에는 숭례문 중앙 통로가 시민에게 개방되면서, 문 아래를 직접 걸어 지날 수 있게 되었다.
구조와 건축 양식의 특징
숭례문은 석축 위에 세운 2층 누각형 건물이다.
아래에는 무지개 모양으로 둥글게 뚫린 홍예문이 있어 통행이 가능하고, 그 위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목조 건물이 자리한다. 홍예문에는 양쪽으로 철을 덧댄 큰 문이 달려 있고, 기단 위쪽은 얕은 담을 두른 뒤 좌우에 작은 문과 계단을 두어 오르내릴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지붕은 앞에서 보았을 때 사다리꼴 형태인 우진각지붕이다. 기둥머리와 기둥 사이까지 공포를 짜 올린 다포식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곡선 과장 없이 단단한 짜임새를 보여주는 점이 조선 전기 건축의 중요한 특징으로 평가된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건축 가운데, 축조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 바로 이 숭례문이다.
2008년 숭례문 방화 화재와 붕괴
숭례문 역사의 가장 큰 비극은 2008년 2월 10일의 화재다.
이날 밤 8시 40분경, 방화범 채종기의 방화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소방차 수십 대가 출동해 진화 작업을 벌였으나, 지붕 밑 구조 특성상 물이 제대로 닿지 못해 초기 진압이 어려웠다. 결국 2월 11일 0시 40분경 2층 누각 지붕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1층에도 불길이 번져 약 5시간 뒤인 새벽 1시 55분경 석축을 제외한 1·2층 목조 누각 대부분이 전소해 붕괴되었다.
처음에는 누전·합선 등 화재 원인을 두고 의견이 엇갈렸으나, 숭례문 전등이 끝까지 꺼지지 않았다는 점을 바탕으로 방화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결국 과거 창경궁 문정전 방화 전력이 있던 채종기가 검거되었다. 그는 개인적인 땅 문제를 이유로 국가 문화재에 불을 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600년 가까이 버티던 서울의 대표 문화유산이 시민들 눈앞에서 무너진 사건은 큰 충격을 남겼고, 이후 문화재청은 원형에 최대한 가깝게 복원하겠다는 방침을 밝히게 된다. 같은 해 8월 15일에는 복구 현장을 시민들에게 공개하기도 했다.
복구 과정과 다시 열린 문
복구 과정에서는 숭례문 주변 석축 안쪽에서 한국전쟁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지하 벙커가 발견되기도 했다. 문화재청은 이를 철거하기로 했고, 도로 위에는 옛 성곽 위치를 표시해 성곽 선형을 시각적으로 복원하는 작업도 진행했다.
복구 공사는 2010년 2월 10일 공식 착공되었고, 수년간의 작업을 거쳐 2013년 4월 29일 완공되었다. 복구와 함께, 일제강점기 이후 사라졌던 동쪽 성곽 53m, 서쪽 성곽 16m 구간도 복원되었다. 동쪽 계단 폭은 기존 2.9m에서 5m로 넓어졌고, 지반은 발굴 조사 결과에 맞춰 이전보다 30~50cm 낮춰졌다.
1층 마루는 기존의 우물마루에서 장마루로 바뀌었고, 공장제 기와는 전통 방식 기와로 교체되었다. 용마루 길이도 15.7m에서 16.6m로 조정되었다. 잡상은 1층이 7개로 하나 줄었고, 2층은 9개로 유지되었다.
2013년 5월 1일에는 관리 주체가 중구청에서 문화재청으로 바뀌었고, 2013년 5월 4일 복구 준공식과 함께 공식 개방되면서 시민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현판 복원과 논란
화재 당시 가장 우려되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숭례문 현판이었다.
2008년 화재 직후, 편액을 보호하기 위해 분리하는 과정에서 현판이 추락해 목재 일부가 탈락·결실되고 부분 균열이 발생했다. 테두리 목재 역시 여러 조각으로 파손되었으나, 결실 조각의 약 95%가 수습되어 원형에 가깝게 보존할 수 있는 기반은 확보되었다.
현판은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져 X선·적외선 촬영 등 과학적 조사와 문헌 검토를 거쳐 접착·보강 복원이 진행되었다. 2009년 7월 3일에는 복원 작업이 완료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덕사 소장 탁본을 근거로 변형되었던 글자 획을 원형에 가깝게 다듬었으며, 테두리 목재는 구조적 안전 문제로 새로 교체되었다. 각자장 오옥진과 단청장 홍창원이 참여해 가능한 한 기존 부재를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으로 복원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후 단청 복원 과정에서 천연 안료 대신 화학 안료를 사용한 사실 등이 드러나면서 부실복원 논란이 일었고, 관련자들은 재시공 비용 등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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