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 독립근린공원 안에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자세히 보지 않게 되는 건축물이 하나 서 있다. 바로 서울 독립문이다.
지금은 도로와 공원 사이에 서 있는 석조 아치 하나처럼 보이지만, 이 문은 조선과 대한제국이 스스로를 ‘독립국’으로 선언하던 격변기, 즉 1890년대의 정치·사상·외교 환경이 응축된 상징물이다.
독립문은 1896년부터 1898년 사이에 세워졌고,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위치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941, 독립근린공원 안쪽이다. 원래는 그 자리에 있던 것이 아니라, 1979년 성산대로 공사 과정에서 옛 영은문 주초와 함께 약간 옮겨 온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그 자리 자체가, ‘옮겨진 독립의 상징’인 셈이다.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을 세우다
독립문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기념비가 아니다.
그 배경에는 서재필과 그가 주도한 독립협회, 그리고 청일전쟁 이후 달라진 동아시아 정세가 있다.
본래 그 일대에는 영은문이라는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은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상징적인 장소로, 조선이 스스로를 ‘청의 속국’처럼 취급하던 시절의 기억이 서려 있는 공간이었다.
청일전쟁이 끝나고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은 청으로부터 ‘형식상’ 완전한 자주독립국이 되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도, 외국에서도 이 변화를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여기서 서재필이 움직인다. 그는 청에 예속되던 상징인 영은문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세우자는 계획을 세운다. 단지 새로운 문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예전의 수치를 눈앞에서 지우고, 그 자리에 자주독립의 표식을 세운다”는 개념이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한 조직이 바로 독립협회다.
조선 정부 역시 이 제안에 호응했다. 당시 정부는 청과 일본, 러시아 등 열강의 압박을 동시에 받던 상황이었고, ‘독립국임을 대내외에 상징적으로 보여줄 장치’가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독립문은 민간 지식인들과 정부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탄생한 기념비라고 볼 수 있다.
서재필이 설명한 ‘독립문’의 의미
서재필은 자신이 발행하던 《독립신문》을 통해 독립문의 취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1896년 6월 20일자 국문 논설에서는, 조선이 수백 년 동안 ‘청의 속국’처럼 책력을 받아오고 청나라 연호를 쓰며, 백성들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현실을 ‘수치’로 지적한다. 그러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이 독립국이 된 것은 “종문서(종의 문서)를 되찾은 것과 같은 일”이라 표현하며, 이때야말로 역사에서 가장 큰 경사라고 강조한다.
그는 “과거 영은문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상징이었으니, 그 자리를 비워두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아예 그 자리 위에 독립문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문을 보고 후대 사람들이 “조선이 자주독립을 되찾은 시대가 언제였는지 잊지 않게 하자”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같은 해 7월 4일자 논설에서는, 독립문과 함께 독립공원을 조성하자는 구체적인 계획도 언급된다.
맑은 공기, 경치 좋은 곳, 시민이 산책하고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그곳을 ‘자주독립을 기념하는 공원’으로 삼자는 발상이었다. 독립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공간과 건축으로 물질화하려는 시도였던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영문판 독립신문에서의 서술이다.
영문 논설에서는 독립문의 의미를 단순히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에만 한정하지 않는다.
청의 ‘속국’ 체제와 부패한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것을 넘어, 일본, 러시아, 유럽 열강으로부터의 간섭에서도 벗어나야 할 상징으로 독립문을 해석하고 있다. 즉, 독립문은 “청으로부터의 해방”이자 동시에 “어떤 강대국에도 휘둘리지 않는 자주국가의 선언”이라는 의미를 함께 품고 있다.
파리 개선문을 닮은 석조 아치, 독립문의 건축
독립문은 프랑스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에서 모티브를 따온 석조 기념문이다. 1896년 11월 21일 기공식이 열렸고, 정부의 지원과 민간의 모금이 함께 더해져 공사가 진행되었다. 완공 시점은 1898년 1월로 알려져 있다.
설계는 외국인이 맡았고, 실제 건축 과정은 한국인 기사 심의석이 담당했다.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설계자가 “독일 공사관에 근무하던 스위스인 기사”라고만 언급하는데, 이후 일부 러시아 학자들이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인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설계에 관여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다만 현재까지 공개된 자료로는 사바틴이 독립문 설계를 맡았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독립문은 전체를 화강석으로 쌓아 올린 아치형 구조다.
내부에는 정상부로 올라가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가운데 이맛돌에는 조선 왕조의 상징이었던 오얏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그 위 양면에는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태극기 도안도 함께 들어가 있다. 이 조합 자체가 당시 조선이 선택한 ‘정체성 선언’에 가까운 조형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독립공원은 애초 구상보다 축소되어 조성되었다. 재정 여건이 따라주지 못한 탓이다. 그럼에도 독립문과 영은문 기초, 주변 공간을 묶어 하나의 상징 구역으로 만드는 시도는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독립문이 겪은 또 다른 아이러니
독립문은 원래 ‘청에 대한 예속의 역사’를 끊는 상징으로 세워졌지만, 이후에는 또 다른 제국의 통치 아래에서 복잡한 취급을 받게 된다.
일제강점기 초기, 일본 제국은 독립문을 청일전쟁에서의 일본 승리를 상징하는 기념물 혹은 ‘내선일체’의 선전 도구처럼 활용하고자 문화재로 지정하고 수리하기도 했다.
하지만 상황은 곧 뒤집힌다.
3·1운동 이후, 독립문에 새겨진 태극기와 ‘독립’이라는 이름은 다시 한국인의 저항과 독립 의지의 상징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 지점에서 독립문은 일본에게 불편한 기념물로 바뀌었고, 관련 기록들이 검열되거나 제대로 남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국내보다는 해외 독립운동에서 상징 이미지로 더 많이 활용되었다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광복 이후에는 이승만 정부가 독립문을 적극적으로 ‘국가 독립의 상징’으로 재포장했다.
특히 이승만 본인이 독립협회 활동과 연관이 있었던 점도 작용했다.
1954년부터 사용된 대한민국 100환 지폐 뒷면에 독립문이 들어간 것도 같은 맥락이다.
1963년 독립문은 대한민국의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고, 1979년 성산대로 공사 과정에서 영은문 주초와 함께 지금의 위치로 약 70m 이전되었다. 오늘날 독립근린공원 안에 독립문과 영은문 기초, 독립관이 함께 자리한 풍경은 바로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서울 독립문은 오늘날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석조 아치 하나에 불과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청에 대한 예속의 기억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자주독립의 상징을 세우려 했던 개화기 지식인들의 고민, 제국주의 시대의 역학, 일제강점기의 왜곡과 검열, 그리고 광복 이후 다시 ‘독립의 기념비’로 자리 잡는 과정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장면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독립문은 거대한 승전 기념비라기보다, “더 이상 누구의 속국도 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시대가 세운 하나의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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